당시 시대, 사회적 배경
그가 관직에서 활약하던 광해군조(光海君朝, 1608∼1623)와 인조조(仁祖朝, 1623∼1649)는 당쟁으로 사회가 어지럽던 시대였다. 이미 사류는 명종(明宗, 1545∼1567) 말엽부터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갈라져서 선조(宣祖, 1567∼1608) 연간에는 그 싸움이 극에 달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큰 국란이 닥쳤음에도 일본에 보낸 통신 정사와 부사가 당론에 따라 엇갈린 진술을 하는 등 극심한 혼란을 가져왔다. 그런 와중에 서인이 정권을 잡았다가, 동인으로 넘어간 후, 선조 말기에는 동인의 한갈래인 북인(北人)이, 광해군조에는 북인의 한갈래인 대북(大北)이 정권을 잡던 시대였다. 이때에도 왕위계승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이 있었던 결과, 북인의 다른 갈래인 소북(小北)이 제거되고 대북이 집권하게 된다. 대북정권은 당시 명청 교체기 때 중립외교노선을 취함으로써 순간적으로 중국정세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을 막았으나, 명나라를 종주로 여기는 서인, 남인들의 반감을 샀고, 왕권강화과정에서 있었던 폐모 논의, 형제를 처형한 것 등으로 인해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물러나게 된다.
광해군을 폐위하고 정권을 잡은 서인 정권은 산림의 학자들을 일부 우대하여 이미 망해가는 명나라에 사대외교를 하느냐 중립노선을 취하느냐를 놓고도 서인과 남인간의 갈등이 있었고, 율우(율곡과 우계)를 문묘에 종사하는가의 여부 등을 놓고 논쟁하기에 이르렀으며, 이 시대에 당대의 많은 문인들은 이러한 정파에 연줄을 대어 출세를 꿈꾸는 것이 보통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은 다시 논공행상을 놓고 이괄의 난이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이후 원당(元黨), 낙당(洛黨) 등의 파벌로 갈라진다. 당시에 파당을 짓는 작태가 한창 만연하여 온 세상이 앞다투어 몰려다녔다. 그러나 이경항은 이런 파벌에 가담하기를 거부했다. 허목이 쓴 묘갈명에 의하면 그는 정직하고 성실함을 좋아하여 세태를 따르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않았으며, 그러다 벼슬을 잃는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았다<미수 허목, 첨정이공묘갈명> 한다.
또한 인조실록 중 인조 7년의 기사 중 이경항이 형조정랑에 임명되자 임숙영의 문인이었다가 이이첨의 문하에 드나들었다는 것을 들어 사간원에서 탄핵하고, 유적에서 삭제되었다는 기사도 눈에 띈다. 당시 정권이 서인 정권이었고, 그 외에 남인 정권이 유일하게 서인과 대치하는 형국이었는데, 그 어느 당에도 소속되지 않은 그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점이 의아스럽다.
단 이경항의 처가는 서인 계열이었는데, 이때 인조반정의 공신이기도 했던 서인 이서(李曙, 이경항의 처부 전주이씨 李慶裕의 형 李慶祿의 아들)가 이경항의 이름을 유적에서 삭제한 것에 반발, 압력을 행사하여 유적삭제가 취소되었으니 사론이 분하게 여겼다는 기사도 바로 나온다.<인조실록 19권, 인조 6년 12월 25일 신해 3번째기사 1628년 명 천계(天啓) 8년 우승지 이경용을 황해 감사로 삼다>
뒷날 이경항의 넷째 아들 송곡 이서우(松谷李瑞雨)가 출사할 때, 남인 중 탁남파에서 집요하게 아버지 이경항의 전력을 문제삼아 공세하는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때 이경항과 한 동네에서 살았던 허목(許穆)의 변호로 이서우는 청요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숙종실록 4권, 숙종 1년 12월 15일 무진 4번째기사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지평 이서우가 여러 번 소패를 어긴 것으로 인피하고 물러나다><숙종실록 4권, 숙종 1년 10월 11일 을축 1번째기사 1675년 청 강희(康熙) 14년 축성에 대해 논의하고, 윤휴가 이수경·신선온·이후항이 도당록에서 빠졌음을 아뢰다>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감으로써 그 행적이 남게 되었다. 이경항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그를 도와주었던 인물은 사촌처남인 완풍부원군 이서(李曙)였다.
이경항의 선조는 본래 이억(李山+疑)이 조선건국 후 개국공신에 책록되었듯 공신가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이억은 고려조에 종신토록 충성하고저 관직과 공신녹권을 내버렸으나, 그 아들 이만(李蔓)이 조정에 출사하여 그로부터 계속 관직이 이어졌고, 단종폐위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간 도촌(桃村) 이수형(李秀亨, 1426∼1528)은 이억의 4대손이었다. 그러나 이수형의 숙부 이경연(李景衍) 혹은 그의 조카 이지방(李之芳)의 대에 경기도 광주(廣州) 낙생면(樂生面)과 언주면(彦州面) 일대에 정착하게 되는데 이경항은 경연의 7대손이고, 이지방에게는 5대손이 된다. 이지방 이후 1970년대 언주면은 강남구로, 낙생면은 성남시로 편입되기 전까지 그의 일족들은 대대로 서울 서초구 원지동, 신원동 일대, 내곡동, 포전리(포이리에 편입되었다가 포이동이 됨), 성남시 대장동 일대와 그 주변, 태릉 주변에서 대대로 생활하였다.
이후 이경항의 가계에서는 대체로 무과출신의 인사들이 나오다가, 선조말엽에 이르러서는 대북계열의 인사가 나오는데, 이경항의 백부 이명남(李命男, 1556∼1619)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판에 이르렀고, 이명남의 아들 이경익(李慶益, 1573∼1624)은 광해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에 이르렀다.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즈음, 이미 이명남은 사망하였지만, 그의 아들 이경익은 반정으로 대북의 인사들이 숙청될 때 삭직당하였다가,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서 조정관리들이 피난갈 때, 대북 및 소북 등 북인계열 인사 49명을 제거할 때 처형당한다.
그가 일찍이 홀로되어 외롭게 늙고있는 백모를 친어머니처럼 모셨다고 하였던 것을 볼 때, 이명남의 부인이 그때까지는 생존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명남의 부인은 족보에는 실전되었으나, 뒤에 전의이씨와 동래정씨 부인이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전의이씨는 이대임(李大任)의 딸이고, 동래정씨는 정순하(鄭純嘏)의 딸이다. 다만 누가 이명남의 전취 부인이고, 누가 이명남의 후취 부인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명남의 자녀는 족보 기록으로는 1남 1녀만 기록되어 있다. 아들은 이경익이고, 딸은 이간(李幹)에게 출가한 딸이 하나 있었다. 종형은 일찍죽고(이경익이 1624년 서인정권이 이괄의 난을 계기로 정적들을 제거할 때 살해당한 것. 이괄 군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 하여 그해 4월 북인 인사 40여명을 처형했다. 이경익은 이때 죽지는 않고 고문을 받다가 사망한다.) 그의 딸 중 어렵게 지내는 두 딸이 있었다는 부분도 있다. 그렇다면 이경익에게는 두 딸 외에도 다른 딸들이 있었다는 뜻이 된다.
족보의 기록에 의하면 이경익에게는 두 딸이 있어 남명익(南溟翼)에게 출가한 딸이 있고, 안진(安震)에게 출가한 딸이 있다. 동방미디어에서 출시한 보주문과방목의 기록을 찾자 이경익의 사위가 두 명 나왔다. 남명익(南溟翼), 남명우(南溟羽)가 그들인데, 이들은 의령남씨로 각각 형제이며, 문과에 급제하였다.
남명익의 경우는 확실하나 남명우는 다소 다른 문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마도 남명우에게 출가한 딸은 이경항의 후처였거나, 혹은 이경항의 서녀로 남명우의 소실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기록을 보다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 남명우에게 출가한 딸 또는 서녀가 다른 두 딸보다 나이가 연상이었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문과방목에서 이경익이라는 이름으로 찾으면 남명익의 처부, 남명우의 처부, 남언창의 외조부 기록에 이경익이 있었다. 남언창은 우리 우계이씨 족보기록을 보면 남명익의 子 南彦成 南彦昌 중 1인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미 이경익에게는 여러 딸이 있었으나, 그 중 기록으로 찾을 수 있는 딸은 세 명이며, 그중 큰딸 혹은 나이가 더 많은 서녀는 이미 이경익이 생존할 당시 의령남씨 남명우에게 출가하였고, 두 딸은 이경익이 사망할 당시에 아직 미혼이었다. 부친이 당시 집권당과는 반대세력에 있다가 죽게되자 생활은 상당히 곤궁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부친의 사촌이었던 이경항이 그들에게 비용을 대주어 시집보내 주었던 것이다. 그 중 막내딸은 안진에게 출가하였으며, 둘째는 이미 큰딸의 남편인 남명우의 동생 남명익에게 출가하였던 것이다. 선조실록과 대동야승을 보면 남명우도 광해군 때에 활약한 문관으로 인조반정으로 삭직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과방목의 기록에 의하면 이경익의 처부는 성철(成哲)이라 한다. 여기에서 이경익의 처부 기록이 사실상 우계이씨 족보에 등재되어 있지 않아서 의문점이었고, 이경항의 묘갈명에도 일절 종형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당시의 분위기 상으로 볼 때 이미 사망하였으리라는 추측을 할 뿐이다. 다만, 이경익의 처부를 찾을 수 있었는데, 보주문과방목 외에도 디지털한국학의 문과방목에도 나타나 있는데, 이경익의 처부는 성철(成哲)이었다. 성씨는 창녕성씨의 유일본이 있다. 1624년에 인조와 서인들에 의해 정적으로 몰려 처형당한 성철이 그 성철과 동일인물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기록이나 정보는 찾아볼 수 없었다.
부인과 자녀
이경항의 부인 숙인 전주이씨는 묘갈명에서 서술한 대로, 효령대군 보의 후손이며 부친은 호서수군절도사 贈兵參完原君 이경유(李慶裕), 조부는 온양군수 첨지 贈兵判 간(幹), 증조부는 풍덕군수 광윤(光胤) 贈參判이었다.
효령대군 이보의 후손으로, 효령대군의 장남 의성군 이채(誼城君 李寀)가 5대조이다. 고조부는 의성군 이채의 셋째 아들 운림도정 이핍(雲林都正 李愊)이고, 증조부는 파성군 이철동(把城君 李哲仝)이다.
이 중 앞서 이경항이 과거나 집안문제로 시비가 붙었을 때, 이경항을 구해주었던 이서(李曙)는 온양군수 이간(李幹)의 손자이자, 이경유의 형인 이경록(李慶祿)의 아들로, 이경록은 제주목사 등을 지낸 임진왜란 때의 장군이다. 이경록은 이경항의 처삼촌, 완풍부원군 이서는 이경항에게는 처사촌이 되었다. 그는 인조반정 때에 정사공훈을 세웠으며 후에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에도 활약하였고, 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었다. 그는 사전에 청나라 군대의 침입을 예상하여 남한산성을 정비하고 개축했다고 한다.
묘갈명을 보면 숙인이 공보다 1년 앞섰으며 67세에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숙인은 1600년에 태어나 1667년에 타계하였으며, 넷째아들 이서우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유생이 되었으며, 현종 때 증광문과에 급제할 때까지는 생존하고 있었다.
묘갈명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숙인은 후에 아들들이 영달하여 부군 이경항이 증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추증되고 다시 자헌대부 예조판서로에 증직됨에 따라 정부인에 추증되었다.
이경항은 4남 4녀를 두었다. 1810년 이후에 편찬된 우계이씨의 족보에는 3남 2녀만 기록되었는데, 셋째 아들 이희우(李喜雨)의 존재는 송곡 이서우의 사마방목 입격 기록<사마방목, 이서우 편>과 선원록의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족보 중 운림도정파 가문의 기록에서 이희우의 이름이 나타났다.
셋째 아들 이희우는 다른 곳으로 출계했던 것 같지만 입양된 곳은 알려지지 않았다. 청주한씨 교리 한영의 딸과 결혼했으나 일찍 죽은 그의 큰아버지 이경복의 양자로 입양되지는 않았다. 이서우가 쓴 할아버지 이길남의 묘갈문에는 이희우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송곡 이서우의 문집인 송파문집 제16권의 묘갈문 중에 선조고증좌승지부군묘표음기 라는 것이 넷째아들 이서우가 쓴 이길남의 묘문이다.
딸 넷 중 둘째 딸은 송곡 이서우가 일찍 요절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첫 딸과 셋째 딸 외에, 넷째 딸의 행적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아들 4남은 덕우, 가우, 희우, 서우인데, 미수는 이 중 가우에 대해 재주가 많았으나 무명이었다라고 적어놓았다. 무명이라는 뜻은 명운이 없다, 즉 명이 짧았다고 기록할 수도 있고, 다르게 본다면 운이 없다,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가우(李嘉雨, 1621.10.12.∼1646.03.14.)는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고 채유후가 쓴 이군묘갈명에 나타나 있으며, 그밖에도 이가우의 절친이었던 반계 유형원이 그의 묘지문을 지었다고 한다.
넷째 아들 이서우가 큰형 이덕우(李德雨, ?~1687)가 죽자 제문을 지었다고 한다. 이는 송파문집 12권에 나타난 것으로 丁卯十一月二十六日이라고 날짜까지 기록하였다. 이덕우의 사망 일자는 그해 11월이었던 것이다.
이가우의 족보 기록에는 이가우가 숙종 41년(1705년) 7월 15일까지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음보로 이조참판까지 역임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것이 셋째 아들 이희우(李喜雨)의 사망일자이다. 이름이 비슷한데다가 어디로 입양되었는지 제대로 행적이 전하지 않은 이희우와 이가우를 혼동한 것이 틀림없다. 이희우는 어느 지방으로 입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마방목에는 이희우가 진사시에 합격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사마방목 관련 추가 기록이 나타나야 알 부분이다. 혹은 이희우가 향시에 입격했을 가능성이 있다. 셋째 아들 이희우는 효령대군파의 족보와 선원록에도 이름이 나타난다. 그는 이조참판과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내고 1705년 7월 15일에 사망했다.
미수허목이 쓴 이경항 묘갈명에 서우 문과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당시 송곡(松谷) 이서우(李瑞雨, 1633∼1709)는 아직 관직에 임용되기 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아쉬웠던 점은 이경항의 장남이었던 이덕우(李德雨)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는 점이고(족보에도 이름만 실려 있고, 나머지는 누락되어 있음), 사마방목에 기록된 또다른 아들 이희우(李喜雨)에 대한 기록도 없었던 점이다.
아마도 덕우는 그무렵 다른 곳에 있었거나 아니면 일찍 사망하였을 수 있지만, 아들 일관(日觀)이 있었던 것을 볼 때 그 당시에는 살아있었던 것으로 본다. 부유섭, 임미경 등의 연구에 의하면 이덕우는 1687년(숙종 13)사망했다 한다. 송곡 이서우의 문집 송파집의 祭白氏文이 1687년경에 쓰여졌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여기에서 이서우는 우리 부친에게서 나온 가지가 남녀 각 4인인데 혹 일찍 상하기도 하였다. 그 중 둘째 누이와 큰형을 잃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희우의 경우 사마방목 기록에 의거, 이서우의 급제기록 중 안항(형)의 기록에 이덕우(李德雨), 이가우(李嘉雨), 이희우(李喜雨)가 나와 있어, 이서우에게 이미 세 분의 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희우는 묘갈명에 실리지 않았는데, 아마도 미수가 잘못 알고 누락시키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혹, 출계한 자녀는 생부의 묘갈명에 누락시키는 사례도 더러 있어, 이경항의 형으로 그보다 일찍 사망하였던 이경복(李慶復, 이경항의 형이자 이길남의 장남으로, 이경항이 생원시와 진사시에 연속 합격하는 1618년에는 사마방목의 기록에 나타나는바, 그때까지는 생존해 있었던 것이다.)의 후사로 출계하지 않았는가도 생각된다.
이희우에 대한 기록을 사마방목(하버드 옌칭 도서관 소장본) 외에도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족보에서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반계 유형원이 이가우를 추모하면서 이자시전을 지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 반계 우반동에 칩거하면서 경세의 방략을 서술하고, 군사와 북벌계획까지 폭넓은 학문과 사상을 남긴 그 반계 유형원이었다.
이경항의 처사촌 완풍부원군 이서의 사위 채유후가 특별히 이가우의 묘갈문을 지었다. 이가우에게는 외6촌 매형뻘이 된다. 채유후는 동명 김세렴, 이가우의 장인과도 막역하게 친한 사이였다.
1646년에 사망한 이가우가 1705년 사망으로 잘못 기록된 원인, 그리고 이희우의 몰년을 알 수 없는 원인을 찾을수 있었던 것이다. 이름자의 획수가 비슷한 이희우의 사망년월일과 이가우의 사망년월일을 오해한 것이다. 허목이 쓴 이경항묘갈명에 이가우는 뛰어난 재주가 있었는데 일찍 사망했다고 하였다. 이가우는 초시에 합격했지만 복시에 합격하지 못한 것이다. 채유후가 이가우의 묘비문을 지었는데, 이가우의 장인인 동명 김세렴이 그의 망년지우 친구인 채유후를 찾아가 사위의 묘갈명을 부탁한 것이다. 가선대부 이조참판의 벼슬 역시 이가우가 아닌 이희우의 직책으로 봐야 타당할 것이다.
이희우의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데, 사마방목의 이서우의 안항 편에 등장하고, 전주이씨 효령대군파의 족보 중 女 李慶恒 父贈承旨 吉男 子德雨嘉雨瑞雨喜雨로 나온다. 송곡 이서우의 형이거나 동생이었을 이희우는 생년은 미상이며 1705년에 사망하였다.
그런데 송곡 이서우가 쓴 先祖考贈左承旨府君墓表陰記에는 덕우, 가우, 서우만 나왔다. 이희우는 분명 다른 누군가의 양자가 되었을 것인데, 이경복의 양자가 되었다면 경복의 양자로 간 것이 기록되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다. 이로서 이희우는 이경복의 양자로 출계하지는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우계이씨 족보에 수록된 1705년에 사망한 것은 이가우가 아니라 이희우의 기록으로 추정된다.
딸은 넷인데, 그중 파평윤씨 윤득열의 후처로 출가한 딸이 가장 연장자였다. 송곡 이서우보다는 한참 연장자였을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누이는 송곡 이서우가 이덕우를 추모하는 만사인 제백씨문에서 언급한 데로 일찍 사망했다.
세 번째 누이는 이서규에게 출가했는데, 당시 보통 10여 세 전후에 양가의 부모간에 약혼을 하는 전례가 있었기에, 이경항이 사망할 당시 10여세의 나이인데 결혼했을 것이다. 이서규는 1670년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였고, 미수 허목이 이경항의 묘갈명을 쓸 당시에는 진사였다. 사위 이서규는 1630년생으로, 성종의 왕자 익양군의 후손이었다. 익양군파의 족보 기록이다.
사위 이서규는 1670년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후에 관직에 나가 교관(敎官), 별검(別檢)을 역임했다.
네 번째 누이에 대한 행적은 미상인데, 미수 허목이 쓴 이경항 묘갈명에도 언급이 없고, 송곡 이서우의 문집에는 별다른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찍 요절했거나 아니면 기록이 실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대북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사판과 유적에서 삭제될 위기에 처하여 부득불 완풍부원군 이서의 도움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가 졸한 뒤에도 서인의 당원 및 일부 남인의 당원들이 그를 대북의 당원으로 몰고 갔다. 이경항과 한 동네에서 살았던 허목의 변호와, 이서우를 문하생으로 길러냈던 백호 윤휴가 적극적으로 변호해야 했고, 허목은 그가 대북 당론에 물들지 않았음을 한동네에서 살면서 직접 보았다고 진술하면서 그제서야 시비가 사라진다.
효령대군의 운림도정가문의 사위였던 이경항은 공교롭게도 성종의 왕자 익양군 집안에서 사위 이서규를 맞이하였다. 왕실 각 왕자대군, 군의 족보를 모두 일괄하여 편찬한 선원록 중 1900년 제작된 선원보에는 그의 이름이 효령대군파 운림도정파 족보와 익양군파 족보 총 2곳에 이름이 나타나게 된다.
이경항은 사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대장동 절골부락(사동)의 선산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1667년(현종 8) 부인 전주이씨가 사망하면서 다시 광주군 언주면 내곡리, 현 서울 서초구 내곡동 태릉 서남서쪽 산기슭, 이지방의 묘소가 있는 오른편에 이장되었다. 그후 1995년 10월 서울시 도시개발계획에 의해 다시 성남시 대장동으로 이장되어 왔다.